어려서부터 저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엔 공부가 최우선시 됐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너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다며 참으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고,
그런 어른들의 말씀에 잘 순응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간 후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누리며 이것저것 많은 것을 해보았지만 저의 대학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는일 마다 잘 되지 않았던 건 당연한 것이었고,
그러한 실패가 제인생의 소중한 자산이된 건 분명하지만 실패하는 대신에 귀중한 시간을 잘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대학교 1,2학년때는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아 데모 동아리 활동과 불우 아동을 돕는 길거리 통기타 공연으로 바빴습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해서는 취업위주의 달라진 대학환경에 나름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호주워킹홀리데이, 중국 어학연수를 다녀왔었고,
4학년때는 모자라는 학점을 채우느라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대학 1,2학년 때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며 좌충우돌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후 취업걱정으로 어학과 학점을 보완하며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는데 어찌보면 4년이란 시간 중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던 건 군대가기전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전부 였던거 같습니다.
이 당시엔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것을 시작하는데 있어 모든 것이 막연했고 시간은 많았지만 돈이 없었고, 무엇보다 무언가 배우려면 서울까지 다녀야 할 정도로 저희 동네 교육인프라는 빈약했습니다.
저는 음악에 관심이 많습니다.
고등학생때 성당에서 밴드를 했었고, 대학때는 문예패라고 노래하는 동아리, 길거리 통기타 거리모금을 했었죠.
저는 항상 노래파트였기 때문에 악기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타나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몇번 서울에 있는 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았고, 들이는 비용이나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없다는 판단에 그만 두곤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은 장벽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대학생이나 바쁜 직장인들도 입시 준비하는 학생 가르치듯이 가르치니 끝까지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직장인은 취미로 하고 싶어하는 건데 그걸 잘 못맞춰 졌던 거죠.
직장에 취직한 후 달라진 것은 제가 돈을 벌기 시작해서 음악을 배우는데 돈을 쓸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얼 배울까 생각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피아노나 기타는 어려울 것 같고 드럼은 좀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전자드럼을 구입하고 드럼 학원을 다니기 시작 했습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일주일에 두번씩 홍대까지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나가더군요. 사실 일주일에 두세시간 쳐서는 어림도 없던 겁니다. 실력이 늘려면 집에서 연습을 해야 했는데 공동주택에서는 전자드럼이라도 마음껏 칠 수 없었습니다. 와이프는 층간 소음에 민감했지요.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몇번의 부부싸움 후에 내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자체가 가정의 화목을 해치는 일이구나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단 가정에 충실하기로 저의 꿈을 접으면서 정신없이 몇년을 보내게 됩니다.
2012년 경이었던 거 같은데 서울에만 있던 실용음악 학원이 제가 살던 동네에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길건너 실용음악 학원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의 흥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퇴근후 저녁에 잠깐 집앞의 학원을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드럼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었구요.
예전과 달리 매일 학원에 가서 연습을 할 수 있게 된거죠. 그런데 그렇게 재미를 붙여 너무 연습실만 가다보니 아내랑 애들과 집안일 문제로 싸우게 되더군요. 다시 학원을 접게됩니다.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종교활동을 하거나 학원을 다니는 것 외에는 루트가 없었습니다. 까페 모임도 서울에서만 활성화 됐었구요. 시간과 돈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구조하에서 애를 키우는 아빠가 음악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접하면서 접었던 꿈의 불씨가 되살아 납니다.
인터넷을 통해 각종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유튜브나 어플을 통해 각종 강좌를 무료로 얻을 수 있게 된겁니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스마트폰을 통해서 정리하고 저장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가장 좋았던 건 이 모든걸 출퇴근 시간이나 짜투리 시간에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스마트 기기를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은
2012년 아이폰을 구입하면서 입니다.
물론 그전에 사용하던 스마트폰도 PC로 영화를 다운 받은 후 영화 인코딩을 해서 출퇴근하면서 듣고 자료도 정리하고 하긴 했지만, 노트북보다 작은 컴퓨터란 의미 정도였거든요.
하지만 아이폰의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제가 이런게 있었으면 좋겠다며 찾아보면 원하는 어플이 있었고 강좌들도 인터넷에 찾아보면 있었습니다.
저는 이걸로 영어공부, 시사공부, 기타 및 드럼공부, 그림그리기 등을
제 방이나 출퇴근 길 등 자유롭게 그것도 공짜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엄마나 아빠에게 크나큰 선물이었던 거죠.
이렇게 스마트기기를 사용하여 제가 하고 싶은일들을 구현하면서 저의 맥라이프는 시작되었습니다.
맥라이프를 시작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였습니다.
맥라이프로 처리할 대상을 정하는 것과 그 처리방법.
갑자기 부자가 된 졸부는 돈에 대한 개념도 없고 돈 쓰는 법도 모른다고 하지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마트기기라는 슈퍼파워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망이 갑자기 터져나오기 시작한거지요.
저의 욕심이 지나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적다보니 끝이 없었고
수 많은 어플 중 어느 것이 좋은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많아지는 데이터의 처리방법도 이게 맞는 걸까 많이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저는 영어, 일어, 중국어, 독서, 영화, 사진, 드럼, 통기타, 일렉기타, 노래, 팝송 등을 아이폰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 했지만
말이 쉽지 그동안 그런걸 해본 적도 없고 회사다니고 애키우면서 인생을 보내왔던 사람이 아이폰 하나 쥐어 줬다고 위에 나열한것들이 갑자기 될리는 없었지요.
그래서 할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서음운봉이라는 체계를 만들었고
할일이란 사람, 공간, 시간 속에서 맞물려가는 거라는 생각에 시공인이라는 철학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의 맥라이프는 아직도 진행중이고 시행착오 중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그 동안에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자는 의미도 있고
가능하다면 널리 공유해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의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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